CF/신문잡지2016. 1. 22. 19:52

1982년 대한전선 대한로얄칼라텔리비젼 지면광고


대한전선. 요새 소비자들에게는 생소한 회사일거다.

가전시장에서 70-80년대 금성사 삼성전자와 경쟁하던 회사다.

주요 생산 품목은 TV 냉장고 등이었고

1980년대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들어서 컬러방송을 시작함에따라

한국에서도 칼라TV 제품을 만날수 있었다.


유럽쪽에서는 1960년대 후반 칼라방송이 이미 시작되었었지만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업체의 입장을 대변해

칼라방송을 늦췄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대한전선 관련기사를 찾아보니 대한전선그룹이

대한제당을 계열사로 두었던 모양이다.

1970년대 사망한 회장과 후임회장이 설씨였는데

현 대한제당 경영진이 이들 후손인지는 모르겠다.


1984년쯤이던가? 현대전자와 대우전자도 가전사업에 참여선언을 하였고

한해전인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대우전자에서 인수하였다.

20년간 금성사 삼성전자와 가전부문에서 경쟁하던 대한전선

대우전자에 인수되지 않고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져고 있었다면

다양한 전자업체가 경쟁체제로 갔었을까?

아니면 IMF와 2008년 금융위기시 인수합병의 회오리를 피할수 없었을까?


대우그룹도 해체되어 대우전자마져 동부에 인수된마당에

살아남기는 힘들었겠지 싶다.

가전사업부가 떨어져나간뒤의 대한전선 1998년 매출액을 보니까

1조4천억원수준으로 전기전자부문 매출액 10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6. 1. 18. 00:18

1992년 12월 10 통일국민당 기호 3번 정주영 후보 지면광고

1992년 12월 17일 통일국민당 "정주영을 선택하는 날입니다" 지면광고

현대그룹 " 움직이기 불편하다고 권리까지 포기할 순 없죠" 지면광고

현대그룹의 전면광고로 투표 독려광고지만 정주영을 위해 한표를 행사해달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해야겠다.

14대 대통령 선거 시도별 개표현황. 서울에선 김대중이 8만표정도 앞섰고 경기쪽은 김영삼이 15만표 정도앞섰다.

정주영은 16.1%의 표를 얻었다. 박찬종은 6.3%


이례적으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쪽에서

동아일보에 광고를 게재하였는데

직접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속내용은

당시 집권정당이었던 민자당의 통치가 오래되었으니

이제 새로운 정당과 후보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내가 찍는다면 정주영이나 박찬종에 투표를 했을테지만

아쉽게도 두 후보뿐만 아니라 양김씨 외에 모든 후보를 특표율을 다합쳐도

3위의 자리밖에 차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정주영과 현대의 특성상

울산이 포함되었던 경남권에서 높은 득표율을 얻을것으로 예상했었지만

23만 9천표대로 김대중보단 2% 높았지만 김영삼의 1/7정도 수준이었다.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으로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세무조사및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곤욕을 치뤘다.


김영삼은 칼국수를 통한 청렴이미지

전노 비자금조사, 금융실명제 실시등

집권 초중반까지 개혁과 청렴의 이미지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후반부 아들인 김현철 문제와 IMF가 터지면서

결정적으로 민심이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자민련 총재였던 김종필은 의원내각제를 통한 수상자리를 노렸으나

끝내 의원내각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의 정주영은 금강산 관광 기아자동차 LG반도체 인수등

김대중 정권들어 특혜시비가 불거졌다.

거기에 아들인 정몽구와 정몽헌등이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서로 정회장의 후계자라고 싸우는등

왕자의 난이 불거져 말년엔 그리 편한 여생을 누리진 못했다.


1992년 12월 16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기타관심사/잡담방2015. 12. 31. 14:19

1988년 여성동아 10월호에서 노태우의 딸 노소영이 시집가는걸 기사로 다뤘다.


요새 한창 관심이 쏠리는게 일본과의 정신대피해할머니에 대한

일본측의 사과문제와 이에 응한 정부관계자의 얼치기협상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때 자신의 스캔들 이혼문제를 터트린 SK그룹의 총수 최태원 회장이다.


다들 알다시피 SK의 전신인 선경그룹은 섬유기업이었다가

노태우잭팟을 터트려서 그가 사돈기업에 밀어주다시피한

유공과 한국이동통신 인수특혜를 통해

그룹의 성장축인 에너지와 통신을

기반으로 커왔다.


사실상 노태우가 밀어주지 않았다면

5대그룹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했을 그룹이

바로 선경그룹이다.


이들이 결혼한건 알고 있었지만

1990년대가 아니라 노태우가 취임한지 얼마안된

1988년 9월 13일 결혼했다는 것이다.


이에 여성잡지들도 앞다투어 최태원 노소영 결혼에 대한 취재기사를 쏟아내었다.

그중에서 노소영관련 헤드라인 부분과 전체캡쳐판을 같이 올려본다.


한가지 흥미로운건 진나라의 여불위처럼

권력자가 자신의 자식을 뻐꾸기처럼 타인에게 보내놓고

자기 자식이 아닌척하는 수법을 쓰는 장면이 떠오르는

정인숙 스캔들과 당시 총리였던 정일권과의 관계

그리고 정인숙의 아들인 박승일씨가 주장하는

자신의 친부가 박정희라는 내용이 우먼센스 10월호 기사로 실렸다.


삼청동에서 벌여졌던 전두환과 연예인들의 파티 기사도 실려있다.

1988년 10월 여성동아 - 소문없이 치른 청와대 경사

노태우 외동딸 소영양 시집가는날

1988년 신부 10월호 - 웨딩스코프

대통령딸 노소영 ' 청와대 결혼식, 보통사람보다 더 검소하게 치렀읍니다'

1988년 우먼센스 10월호 - 노대통령 딸 노소영, 선경그룹회장 아들 최태원

초대받지 못한 로열패밀리의 보통결혼식

전두환씨와 연예인파티 - 전두환씨의 18번은 '떠나가는 김삿갓' 5공화국 시절 삼청동 C본관 연회장에서는 어떤일들이 벌어졌을까?

철저히 감추어졌던 C본관 연회장에 불려갔던 연예인 Y양과 매니저 K씨가 이름을 감추어 달라면서 털어놓은 연예인 파티장 전 스토리

정인숙 아들 " 아버지는 박대통령" 물증있다.

정인숙의 애인 장시공씨와 정일권씨측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시 밝혀지는 정인숙 아들 아버지는 누구인가? 박근혜씨는 잘 모른다.

정인숙 첫 애인 장시공씨 직접 재확인

정인숙 아들은 '박승일'이라는 장시공씨와 이 사건때문에 오해를 받고 있다는 정일권씨 측의 반박내용. 완전공개

1988년 신부 10월호

1988년 우먼센스 10월호에서 다룬 노소영 최태원 결혼식, 정인숙의 아들 박승일이 주장하는 자기의 아버지는 박정희라는 물증, 전두환과 연예인 파티 기사

오른쪽위에 보면 문제많은 조용기 목사가 전두환보고 과거 잘못을 뉘우치라는 기사다. 조용기 자기는 과연 뉘우치고 있는가 묻고 싶어진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재벌 대기업/잡담방2015. 8. 28. 20:39

1997년 HBS 현대방송 지면광고

1996년 HBS 현대방송 지면광고

현대방송 로고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현대방송은 현대그룹에서 만든 케이블 TV 방송사다.


1979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호텔신라 회동


라이벌 삼성그룹은 1965년 일간지 중앙일보사와

방송사 TBC 동양방송을 소유중이었고

1970년대말 전후로 삼성계열 언론사의 현대에 대한 불리한 보도로 인해

현대그룹과 삼성그룹간에 혈전이 벌어지기도 했었기 때문에

현대그룹의 총수 정주영은 언론과 방송사에 대한 소유욕구가 있었다.


오랜 숙원이었던 언론사

문화일보사를 1991년 11월 창간하게 되는데

이듬해인 1992년 1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그해 대선에 뛰어들게 된다.

이건 과거 군사정부때 권력자에게

끌려다니며 바쳐야했던 뇌물

그리고 현대양행을 갈취당한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1995년엔 케이블 TV 현대방송까지 개국하면서

방송과 언론사 소유에 대한 꿈이 일부나마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2년 대선에 나간 정주영 당선 실패는

정주영과 현대의 고난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 소위 괴씸죄에 걸려

현대그룹은 세무조사와 함께

여러부분에서 불이익을 당했는데

HBS방송이 개국한 1995년은 김영삼정부 중반쯤이었다는거다.





언론과 권력에 대한 불이익을

당해봤기에 대선에 출마했지만

오히려 현대그룹 전체로 피해를 보게되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재벌총수들에 대한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수사까지 시작되었다.

그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뒤 정주영은 일선에서 물러나

정몽구와 정몽헌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직함을 바꾸었다.



정주영의 대선에 대한 출마욕심과 언론 방송에 대한 소유욕구는

문화일보사 계열분리 / 현대그룹 세무조사와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조사

현대방송 매각을 남겼을 뿐이었다.


삼성그룹 역시 전두환 정권하에서 TBC 동양방송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갈취당하였는데

1990년대 소송을 걸었으나 패배하여

KBS2 채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수 없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글은 따로 나중에 올려보겠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8. 13. 17:47

1968년 대한석유공사 유공 지면광고


1962년 설립된 공기업이었던 대한석유공사 약칭 유공이

1980년 11월 29일 민영화가 되면서 선경그룹에 넘겨졌다.


박봉환 동력자원부 장관은

국영기업의 비능률 배제, 책임경영확립을

위해 민영화를 추진한다고 밝히며

과거 걸프가 가지고 있던 지분 50%를

671억 7천만원을 연말까지 납부하는 조건으로

선경그룹에 유공을 넘겼다.


박근혜와 이명박이 틈만나면 알짜기업 민영화 추진하면서

하던 말이 저거 아니던가?

아무튼...



19년뒤인 1999년 기사로 밝혀지는 이 사실은

최동규 전 동력자원부 장관이

1994년 전두환과 골프를 치면서

유공 불하과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전두환이 "그때 유공을 선경에 넘기도록 한 사람은 보안사령관이던 노태우야

나도 당시엔 잘 몰랐어" 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1980년 5월에서 9월까지 동력자원부 장관을 지냈던

유양수 역시 '공직과 소신'이라는 기고문에서.

"80년 6월 중순 모처에서 유공 민영화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유공지분 50%를 소유한 걸프사 지분을

전량 정부가 인수해 국유화 하는것이 최우선책"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등의 신문에서도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


훗날 노태우와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은 사돈을 맺는데

노태우 임기말년인 1992년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불리던

한국이동통신 민영화를 추진하였고

이 역시 사돈기업인 선경그룹에 인수된다.

한국이동통신 로고

한국통신 로고


한국통신의 자회사였던 알짜기업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을 사돈인 선경그룹에 넘기고 김영삼 정부 때

전두환과 함께 비자금 4천억의 주인공이 된 노태우

이중에 선경그룹으로부터 흘러들어간 돈은 얼마나 될까?

SK그룹 로고


SK텔레콤 로고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수사 당시 전경련회장이던 최종현이 대국민사과문 발표를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1999년 12월 16일 경향신문

1999년 12월 16일 동아일보

1999년 12월 16일 매일경제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8. 12. 09:28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TBC 동양방송이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이후 KBS2로 바뀐이후

10여년 만에 민영방송 SBS 서울방송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에 당시 공보처 장관이던 최병렬과

땅투기로 돈을 번 태영의 윤세영회장의 행적이 문제시되었고

돈줄의 뒤에는 럭키금성그룹과 쌍용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공보처에서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SBS 태영 윤세영에게 제기된 문제를 변호하는 입장을 띰에 따라

공보처가 태영 윤세영을 위한 태영홍보실 대변인 같다는 비판까지 일었다.

민자방송 사업자 선정당시 공보처 장관 최병렬

조선일보 기자출신으로 5공 당시 전두환에 협조하다가

노태우 정부 때는 5공 청산작업를 주도한 인물로

최틀러로 불리던 노태우의 측근이다.


당시 태영 윤세영과 정부에 제기된건

한국 건설업계 평균 관급공사 비율은 65%였는데

태영의 관급공사 비율은 71%로 평균을 웃돌아

정부(당시 노태우)가 의도적으로 키웠줬다는 문제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겨레신문에서도 이와 같은 의혹기사가 제기된바 있다.

태영 윤세영회장과 1990년 당시 태영의 계열사를 올려본다.


1990년 주식회사 태영 회장(당시 54세)

주식회사 태영 계열사 현황

태영산업 / 태영레저 / 태영화학 / 울산퍼시픽화학 / 서암학술장학재단

주목할만한 회사는 주식회사 태영과 태영산업 정도다.


1990년 11월 1일 윤세영회장과 태영관련 기사

1990년 11월1일 태영민방 참여업체별 지분

1990년 11월 1일 동아일보에서 제기한 의문

민방 주인얼굴 소문대로였다.

태영 결정의 배경과 문제점

1990년 11월 28일 경향신문 민방선정 졸속입증

공보처가 공개청문 자금조사 꺼려

1991년 10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SBS 서울방송 지면광고

1991년 3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SBS 서울방송 라디오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8. 11. 20:59

1994년 9월호 여성중앙 10 26 신재순 모델 이영애

베일속의 '그때 그 여인' 신재순 15년만의 현장증언


10.26 현장과 굴곡진 나의 삶을 말한다.


10.26 궁정동 만찬회장에 가수 심수봉씨와 함께 참석을 했던 여대생. 신재순씨. 이제는 한 가정의 평범한 주부가 된 신씨가 당시 두 눈으로 지켜본 사건의 현장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이학봉 당시 민정수석 등 고위층 인사들과 정부 기관의 도움으로 살았던 그 후의 삶.

팝공연 기획자인 지금의 남편과의 결혼생활 등 가슴독에 묻어둔 이야기 완전 공개


박정희 사망당시 현장에 심수봉과 함께 있었던 신재순이 기사에 실렸다.



 

전두환




이학봉


이 외에 간호장교 이복순의 기막힌 인생유전 김일성은 내 인생을 이렇게 유린했다

한국제분 사장 장녀와 결혼하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아들 재민군


그리고 여성중앙 9월호에서 주목할 만한건 1994년 당시 이영애의 모습이다.

중앙일보사에서 발행되던 여성 주로 주부독자들이 보던 잡지다.

IMF이후 폐간된게 많아서 이 잡지가 지금도 발행되는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8. 5. 20:05

주식회사 화인 사명변경 지면광고

주식회사 화인 프로월드컵 뱅가드 전품목 세일 광고


부산에서 기차표 고무신을 생산하던 업체 동양고무가

사명을 화인으로 바꾼뒤 본격적으로 그룹체제로써 확장을 시작했다.

1978년 나이키와 제휴 판매를 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고 1986년 결별에 나서면서

독자상표인 르까프를 내세웠고 신발기업이 아닌

종합그룹체제로의 변화를 꾀했다.


그 유명한 리복 역시 화승을 통해 판매되기도 했다.

화승그룹으로 전자 유화산업 무역부문으로 확장하다가

1998년 IMF 직격탄에 부도를 맞았다.

화승 관련광고는 몇장 더 있으니

나중에 다시 올려보도록 하겟다.


프로월드컵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국제상사의 프로스펙스와 무슨 관계일까 궁금하던 시절도 있었다.

W모양의 프로월드컵 로고는 1990년대 초반에 농구공이 튀기는 장면을 형상화한 모습의 로고로 변경되었다.




국제상사의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국제그룹의 계열사였던 국제상사는 전두환 신군부의 국제그룹 해체이후

한일합섬에 인수되었고 한일그룹이 부도난이후 최근에 LS그룹에 인수되어 LS네트웍스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한일합섬 역시 동양그룹에 인수되었다가

동양그룹 부도로 현재로썬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꽁으로 주는걸 넙죽 받아먹더니 한일그룹 부도라는 사태를 맞게되는거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극동건설 역시 부도난후에

웅진그룹에 인수되었다가

웅진그룹 유동성 위기로 분리되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국제그룹 해체후 그 기업을 넙죽 받아먹은

극동건설 한일합섬 등이 모두 부도난걸 보면...

남은건 동국제강뿐인가?



1994년 리복 30-20% 세일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재벌 대기업/잡담방2015. 7. 30. 20:53

1978년 1월 1일 한라의 현대양행 전체지면 광고

1978-9년 1월 1일 한라그룹의 현대양행 / 한라건설 / 한라엔지니어링 공동광고


이 광고의 문구를 보면 자신의 미래를 예견했음인가?


한국중공업을 선도하는 현대양행은 올해에도 열심히 일하겠읍니다.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정권의 산업일원화 조치에 따라

현대양행은 대우의 김우중에게 강제인수되려다가

김우중이 2천억을 융자해달라는 인수조건을 붙이자 신군부는 니들에게 2천억 지원해줄바엔

차라리 국가에서 경영하겠다하여 사명을 한국중공업으로 고치고

공기업화시켰다.


1977년 설립한 인천조선 주식회사가

1990년 상호를 한라중공업으로 변경하여

1998년 부도를 낸 이후 현대중공업에 인수되었다.


한국중공업은 1981년 대규모 적자를 보다가

1985년 이후부터 흑자전환하였다.

1989년 민영화 추진시 현대 한라 삼성 럭키금성등 재벌이 뛰어들었고

정부에서 중공업을 가진 재벌로 인수자격을 제한하자

특정재벌에 특혜를 준다는 이유로 한국중공업 노조가 반발하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현대그룹에 인수되는걸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에 2000년 두산그룹에 인수되는데

IMF이후 현대그룹이 김대중 정권의 비호아래 LG반도체인수 기아자동차 인수

금강산 사업 등 인수특혜를 받았다면

현대그룹의 분열이후 특혜로 커온 그룹이 두산과 한화 롯데정도다





식품과 출판을 주로 하던 두산이

고려산업개발 대우종합기계 등

과거 현대와 대우의 건설, 중공업 관련계열사를 대거 인수하여

특혜시비가 일었다.


한화는 과거 금융부분에서 손실을 봣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생명과 그 계열사들을 인수함으로써

나중에 대검에서 정관계 로비수사 회계비리 수사까지 들어갔다.



대한생명 51%의 지분을 판 예금 보험공사는 호주 맥쿼리와 이면계약과 헐값매각을 문제삼아

계약이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소송에서 져 한화가 가져가게 되었다.



맥쿼리


민자사업에 항상 끼어들어 큰 이익보던 바로 그 맥쿼리

이명박과 그의 아들이 관련된 맥쿼리

흔히 먹튀자본이라고 하던가?

인천공항 민영화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항상 이름이 나오는 바로 그 맥쿼리다.

검은머리 외국인과도 관련이 있는 그 회사




롯데관련해서는 나중에 글올리때 적어봐야겠다.


1988년 인천조선 주식회사의 지게차 지면광고

한국중공업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재벌 대기업/잡담방2015. 7. 25. 09:01

1990년 10월 한라그룹 신입사원 모집 지면광고


한라그룹

창업주는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동생이자 둘째인 정인영이다.

정주영과 정인영


정인영은 일본 유학후 귀국 동아일보 기자로 지내다가

1953년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하였다

이후1962년 만도기계와 현대양행(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설립

1978년 한라시멘트 1981 한라건설을 세운뒤

1984년부터 한라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신군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의해

중공업과 자동차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정주영과 김우중에게 강요했던 모양이다.

정주영은 자동차를 택했고 김우중은 중공업을 택했으나

금융권에서 2천억원을 지원해달라고 신군부에 요청했다.

신군부는 2천억원을 지원해 주느니 차라리 공기업화 시킨다며

한국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시켰다.

이 내용은  정주영의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 묘사되어 있다.


정주영 입장에선 현대양행을 정부에 빼았기고 나서

그 동생 정인영이 중공업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는지 한라중공업을 다시 설립했다.

이때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아선지 정인영은 휠체어 신세를 지게되었다.


정주영과 김우중의 관계는 이때 이후 악화되었다. 김우중의 나이는 정몽구와 2-3년 차이나는터라

정주영입장에선 김우중이 상당히 건방지게 느껴졌을수도 있다.

정주영이 보기에 김우중은 부실기업 인수로 커온 기업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대우그룹자체가 정부로부터 금융권지원을 받고 부실기업인수로 그룹의 덩치를 키웠다.

그래서 전두환의 신군부에도 그 같은 요구를 했던것이다. 물론 현대양행의 부채문제도 있었다.)


1992년 정주영이 대선에 출마선언하자

김우중은 자기도 출마하려다가 박태준에게 신당창당을 제의하면서 1천억원을 동원하기로 하는데

포항제철을 하면서 대우의 회계와 부채문제를 알고 있던 박태준은 대우자동차를 팔아

그 돈을 마련할 생각이면 회사재무구조부터 고쳐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무튼 정인영의

한라그룹은 이후 재계순위 12위까지 오르는등 승승장구했으나

1997년 12월4일 5천억원의 어음가운데 1700억원을 막지 못하고 최종 부도처리됐다.

공교롭게도 한라중공업에 1조원을 투자했고 가격덤핑으로 인해 적자를 내다가

이렇게 한라그룹 해체라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한라중공업은 현대중공업에 위탁경영되다가

현대삼호중공업이라는 현대중공업 계열사로 편입됐다.


정인영의 둘째 아들인 정몽원이 회장이 되어

제 2의 한라그룹을 재건하고 있는데 2000년대 들어선

정확히 어떤 계열사들이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현대양행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관련지면광고를 올리도록 하겠다.


1992년 2월 한라그룹 계열사


한라중공업 / 만도기계 / 한라건설 / 한라시멘트 / 한라공조

한라자원 / 한라해운 / 한라레미콘 / 한라창업투자 / 학교법인 배달학원

1990년에 비하면 계열사가 2개 늘어났다

1992년 10월 한라그룹 계열사 마이스터라는 계열사가 하나 더 늘었다. 총 11개

이때 한라그룹 계열사는 총 14개

캄코 한라마이티정보통신 한라제지 이렇게 3개 계열사가 늘었다

1992년 10월 1일 한라그룹 흑백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