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신문잡지2015. 9. 20. 14:33

1989년 아디다스 adidas 제우교역 30% 세일 지면광고


과거 재벌계열사에서는 자동차 가전제품등을 수입하는 담당부서나

따로 회사를 만들어 수입하던 회사들이 있었다.


현대전자의 올림푸스 아남정밀 니콘

두산산업이 월풀냉장고를 수입 판매했듯이

제우교역 역시 도이칠란트의 아디다스 브랜드로 제품판매를 하였다.


요새는 아디다스라는 브랜드만 볼수있지

수입판매하던 제우교역이라는 회사는 볼수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제우교역이라는 회사가 존재하긴 하나

예전에 아디다스를 판매하던 그 회사하고는

이름만 같을뿐 다른회사다.


제우교역은 신발에 편중된 사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0년대 초반 의류 양말등의 사업에 진출하였다


IMF 이후엔 별다른 소식은 접해볼길이 없었다.

과거 수입브랜드로 제품을 판매하던 회사가

IMF이후 경영난 가중되어 계열사가 독립하여

한국 XXX로 사명을 변경해서 나오는 경우는 많이 봐왔다.

제우교역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발생한것인지 궁금해진다.


아디다스하면 가장 유명한 흰색과 어두운 파랑색이 겹쳐진

3선 슬리퍼가 인기였는데 짝퉁제품인 아디도스가 나올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경쟁을 하듯이 그때도 2개 브랜드가 경쟁하던건 비슷했다.


1995년 아디다스 30% 세일 제우교역 주식회사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TV 동영상2015. 9. 19. 00:05

1990년 아시아자동차 록스타 CF


쌍용자동차가 독점하고 있던 지프차 시장에

기아의 계열사 아시아자동차에서

록스타 브랜드로 700만원대의

비교적 싼 가격에 지프차를 내놓았다.


쌍용자동차의 코란도는 900만원대였다.

가볍고 작은 지프차 록스타


CF에서 기억에 남는건 BGM 이랑

길이라도 좋다 아니라도 좋다 라는 멘트였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9. 12. 12:22

1991년 7월 프로월드컵 뱅가드 여름 정기세일 지면광고


1991년까지만해도 주식회사 화인의 스포츠브랜드 상표

프로월드컵의 로고는 W를 형상화한것이었다.



그러나 아래 보이듯이 1991년부터는

농구공이 튀기는 모양을 형상화 시킨 로고로 바뀌었다.

반면 뱅가드의 상표는 1990년부터 변화가 없다.


광고를 올려놓고 보니

세일을 2개월마다 한셈이니 꽤나 자주했다.

자금사정이 안좋았던건가?


프로월드컵의 경우는 운동화와 스포츠브랜드 이미지가 강했다면

뱅가드는 캐쥬얼화 그리고 의류브랜드의 이미지가 있었다.

당시 캐주얼 브랜드로는 금강제화의 랜드로바와

에스콰이아의 영에이지 심플리트가 경쟁을 펼치고 있었는데

여기에 뱅가드도 가세를 한것


워낙 랜드로바 VS 영에이지의 경쟁구도가 쎘기 때문에

뱅가드는 인지도는 있었지만 판매량이

많았을런지는 모르겠다.


당시 랜드로바의 모델은 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

영에이지 심플리트는 남자모델의 경우

박상원과 최재성 박형준 윤동환이 교체되면서 나왔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모델 황진아가 나왔었다.


광고가 꽤 코믹스런 분위기였는데

황진아 역시 인기가 있었는지

꽤 오랫동안 영에이지 시리즈의 모델로 나왔다.

지금은 결혼해서 아기엄마가 되었다고..


프로월드컵 바뀐 로고 광고를 찾았기에 올려본다.


1991년 9월 프로월드컵 뱅가드 가을맞이 찬스세일 지면광고

1991년 11월 프로월드컵 뱅가드 겨울 세일 지면광고

1992년 4월 프로월드컵 뱅가드 러브세일 지면광고

1990년 8월 프로월드컵 뱅가드 전품목 정기세일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9. 10. 17:57

1990년 일화 천연사이다 지면광고


보리음료 맥콜로 인지도를 높인 주식회사 일화

초정리 광천수로 만든 천연사이다를

내세워 사이다 시장에 진출했다.


기존 사이다는 단맛에 탄산이 강했던 맛이라면

일화의 천연사이다는 약간 쓴맛에

탄산을 추가한 맛이었다.


단맛은 없고 쓴맛이 느껴졌지만

의외로 괜찮았다.


당시 사이다 시장은

롯데칠성음료의 칠성사이다가

70% 이상 점유하고 있었고




롯데칠성음료의 칠성사이다


해태음료의 세븐업 7up


코카콜라사의 킨사이다



그 외에 코카콜라사의 킨사이다

해태음료의 세븐업이

경쟁하고 있었다.


해태음료의 세븐업과 일화의 천연사이다는

사이다 시장의 2 - 5% 점유율을 기록했다.


사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세븐업 관련글에서

다시 다뤄보도록 하겠다.


일화하면 문선명의 통일교 재단과도 무관치 않은데

한때 문선명이 통일교를 국교로 삼으면

한국의 빚을 다 갚아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생각난다.


문선명은 2012년 9월 3일 사망했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9. 9. 20:42

1990년 12월 빙그레 아이스크림 투게더 호두맛 컬러 지면광고


1974년 출시된 빙그레 바닐라맛 아이스크림 투게더

당시 빙과류가 20-30원 하던 시절에

우유가 넉넉하지 않던때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이었던

빙그레 투게더는 비싼 가격인 500원에 판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간 2-3만개 생산되었던 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1980년 노주현이 빙그레 투게더 TV CF 모델로 나왔으며

10년뒤인 1990년 지면광고를 통해 다시 모델로 돌아왔다.


온가족이 함께 투게더 투게더~

CM송을 송창식이 불렀는데

차후에 투게더 CF를 다시 올려보겠다.


주식회사 빙그레 로고

롯데제과 주식회사 로고

해태제과 주식회사 로고


80년대 들어 경쟁사인 롯데제과 롯데삼강과 해태제과쪽에서

대응제품을 내놓았는데 롯데제과는 조안나 골드 아이스크림

롯데삼강은 구구 크러스터 해태는 베스트원을 내놓기도 했다.


투게더보다는 베스트원과 조안나골드를 자주 먹었던 기억이 난다


1990년 7월 빙그레 아이스크림 투게더 바닐라맛 컬러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8. 12. 09:28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던 TBC 동양방송이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이후 KBS2로 바뀐이후

10여년 만에 민영방송 SBS 서울방송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에 당시 공보처 장관이던 최병렬과

땅투기로 돈을 번 태영의 윤세영회장의 행적이 문제시되었고

돈줄의 뒤에는 럭키금성그룹과 쌍용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공보처에서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SBS 태영 윤세영에게 제기된 문제를 변호하는 입장을 띰에 따라

공보처가 태영 윤세영을 위한 태영홍보실 대변인 같다는 비판까지 일었다.

민자방송 사업자 선정당시 공보처 장관 최병렬

조선일보 기자출신으로 5공 당시 전두환에 협조하다가

노태우 정부 때는 5공 청산작업를 주도한 인물로

최틀러로 불리던 노태우의 측근이다.


당시 태영 윤세영과 정부에 제기된건

한국 건설업계 평균 관급공사 비율은 65%였는데

태영의 관급공사 비율은 71%로 평균을 웃돌아

정부(당시 노태우)가 의도적으로 키웠줬다는 문제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겨레신문에서도 이와 같은 의혹기사가 제기된바 있다.

태영 윤세영회장과 1990년 당시 태영의 계열사를 올려본다.


1990년 주식회사 태영 회장(당시 54세)

주식회사 태영 계열사 현황

태영산업 / 태영레저 / 태영화학 / 울산퍼시픽화학 / 서암학술장학재단

주목할만한 회사는 주식회사 태영과 태영산업 정도다.


1990년 11월 1일 윤세영회장과 태영관련 기사

1990년 11월1일 태영민방 참여업체별 지분

1990년 11월 1일 동아일보에서 제기한 의문

민방 주인얼굴 소문대로였다.

태영 결정의 배경과 문제점

1990년 11월 28일 경향신문 민방선정 졸속입증

공보처가 공개청문 자금조사 꺼려

1991년 10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SBS 서울방송 지면광고

1991년 3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SBS 서울방송 라디오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8. 11. 21:43

1990년 동아제약 인삼+천연식이섬유 생약 드링크 한삼디

1991년 라미화장품 무스탕 리젠트 (라미화장품은 동아제약의 화장품 계열사다)

1994년 신원에벤에셀의 남성정장 브랜드 모두스 비벤디


블로그에 임성민 사망관련해서 들어오는 방문객이 있길래

지금 가지고 있는 임성민 관련 광고자료를 올려본다.


갑작스레 간경화로 사망하게 된 임성민

1990년 만성간염 진단을 받아 술담배를 끊는등 건강관리에 신경썼던 임성민은

멕시코에서 7개월간 영화 애니깽 촬영을 마친이후

MBC드라마 사랑과 결혼 SBS 고백 이란 드라마에 겹치기 출연으로 무리하다가

1995년 5월 드라마 촬영중 쓰러져 3개월간 병마와 싸우다

8월 20일 39살의 한창나이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181Cm의 훤칠한 키에 도회적인 외모로 인기를 끌었던 임성민

한창때의 나이에 간게 안타깝다.


MBC드라마 사랑과 결혼

이영애 / 김혜수 / 김희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재벌 대기업/잡담방2015. 7. 25. 09:01

1990년 10월 한라그룹 신입사원 모집 지면광고


한라그룹

창업주는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동생이자 둘째인 정인영이다.

정주영과 정인영


정인영은 일본 유학후 귀국 동아일보 기자로 지내다가

1953년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하였다

이후1962년 만도기계와 현대양행(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설립

1978년 한라시멘트 1981 한라건설을 세운뒤

1984년부터 한라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신군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의해

중공업과 자동차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정주영과 김우중에게 강요했던 모양이다.

정주영은 자동차를 택했고 김우중은 중공업을 택했으나

금융권에서 2천억원을 지원해달라고 신군부에 요청했다.

신군부는 2천억원을 지원해 주느니 차라리 공기업화 시킨다며

한국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시켰다.

이 내용은  정주영의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 묘사되어 있다.


정주영 입장에선 현대양행을 정부에 빼았기고 나서

그 동생 정인영이 중공업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는지 한라중공업을 다시 설립했다.

이때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아선지 정인영은 휠체어 신세를 지게되었다.


정주영과 김우중의 관계는 이때 이후 악화되었다. 김우중의 나이는 정몽구와 2-3년 차이나는터라

정주영입장에선 김우중이 상당히 건방지게 느껴졌을수도 있다.

정주영이 보기에 김우중은 부실기업 인수로 커온 기업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대우그룹자체가 정부로부터 금융권지원을 받고 부실기업인수로 그룹의 덩치를 키웠다.

그래서 전두환의 신군부에도 그 같은 요구를 했던것이다. 물론 현대양행의 부채문제도 있었다.)


1992년 정주영이 대선에 출마선언하자

김우중은 자기도 출마하려다가 박태준에게 신당창당을 제의하면서 1천억원을 동원하기로 하는데

포항제철을 하면서 대우의 회계와 부채문제를 알고 있던 박태준은 대우자동차를 팔아

그 돈을 마련할 생각이면 회사재무구조부터 고쳐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무튼 정인영의

한라그룹은 이후 재계순위 12위까지 오르는등 승승장구했으나

1997년 12월4일 5천억원의 어음가운데 1700억원을 막지 못하고 최종 부도처리됐다.

공교롭게도 한라중공업에 1조원을 투자했고 가격덤핑으로 인해 적자를 내다가

이렇게 한라그룹 해체라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한라중공업은 현대중공업에 위탁경영되다가

현대삼호중공업이라는 현대중공업 계열사로 편입됐다.


정인영의 둘째 아들인 정몽원이 회장이 되어

제 2의 한라그룹을 재건하고 있는데 2000년대 들어선

정확히 어떤 계열사들이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현대양행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관련지면광고를 올리도록 하겠다.


1992년 2월 한라그룹 계열사


한라중공업 / 만도기계 / 한라건설 / 한라시멘트 / 한라공조

한라자원 / 한라해운 / 한라레미콘 / 한라창업투자 / 학교법인 배달학원

1990년에 비하면 계열사가 2개 늘어났다

1992년 10월 한라그룹 계열사 마이스터라는 계열사가 하나 더 늘었다. 총 11개

이때 한라그룹 계열사는 총 14개

캄코 한라마이티정보통신 한라제지 이렇게 3개 계열사가 늘었다

1992년 10월 1일 한라그룹 흑백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기타관심사/잡담방2015. 7. 24. 16:35


1990년 가정조선 12월호 박근혜 근영자매 육영재단 최태민은 어떤 사람인가


과거 오마이뉴스로부터 제기된 박근혜와 박근령

육영재단 갈등. 그리고 사건의 불씨 최태민

왜 박지만과 박근영은 노태우에게 편지를 보냈는가에 대한 기사가 2007년에 작성되었다.


가정조선 12월호에 실렸다길래 어떤 내용이 실렸는지 찾아보았다.


제목만 적어보자면


박근혜 근영자매 육영재단 이사장직 교체진상은 이렇다.


1 자매의 갈등인가 재산 싸움인가


2. 당사자들은 말한다


물러나는 박근혜씨 - 건강나빠 쉬고싶었다

신임이사장 박근영씨 - 언니가 도와달라고 했다

어린이회관 관장 송재관씨 -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

사건의 불씨 최태민은 어떤 사람인가


3. 본지 단독입수


박근영씨가 저승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이게 기사 제목들이다.

당시 조선일보사 계열의 가정조선 뿐만 아니라 서울문화사 계열의 퀸

그리고 세계일보사 계열의 세계여성에서도

육영재단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 잡지기사로 다뤘다.


타이틀만 따로 캡쳐한것과 전체캡쳐판을 같이 올려본다.


세계여성 12월호 박근혜 박근영 최태민과의 관계를 다룬 제목

1990년 퀸 12월호 2천억 재산 운영놓고 말 많은 근혜 근영자매 / 숭모회의 정체는? / 박지만과 홍여진

1990년 9월호 퀸 박근혜가 비밀리에 세운 근화교회 최초공개

박근혜의 직접고백 '나는 최목사 이렇게 생각한다' / 창립 예배도중 최태민 목사 문제의 설교 내용

박근혜 최태민 긴밀한 관계 확인 취재 / 최태민 둘러싼 전두환 김재규 차지철 파워게임

1990년 퀸 9월호

1990년 11월호 박정희는 왜 친형친구이자 평양밀사인 황태성을 간첩으로 처형했나?

1990년 퀸 12월호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스포츠2015. 7. 19. 18:30



한국일보사 계열의 일간스포츠가 1969년 9월 창간되었고 쭉 스포츠신문 시장을 독점해오다가

서울신문사 계열의 스포츠 서울이 1985년 6월쯤에 창간되면서 스포츠신문 경쟁시대가 열렸다.



보안사령관 시절의 전두환


서울신문은 YTN 연합뉴스와 같이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관영언론의 입장이 강했기 때문에

전두환 신군부 집권기에 실세중에 실세였던 3허(허삼수 허화평 허문도)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던 허문도가 3S정책(SEX SPORTS SCREEN)을 펼치는걸

전두환에게 건의 대중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우민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프로야구의 개막과 활성화가 되었고 거기에 맞물려 스포츠서울도 창간되었다.

(허화평과 허삼수는 군인출신도 아니고 쿠데타에 참여하지도 않던 조선일보 출신의 허문도가

전두환에게 발탁되어 자신들과 함께 3H라고 묶여서 불리는것을 상당히 싫어했다.)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5공 정권의 실세였던 세사람



게다가 조선일보사에서 1990년 3월에 스포츠조선까지 창간하면서

오랫동안 3사 경쟁체제가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해도 신문면이 아무리 많아봐야 16면에서 24면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32면을 넘어서고 컬러TV방송시작과 컬러면이 많은 스포츠 신문이 창간되더니

통제와 검열이 강했던 성에 대해서 1990년대 들어서 빗장이 풀어졌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소설 연예인 복장 심지어 광고(700 전화광고)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꽤 많이 풀어졌다.

스포츠 신문 3사의 선정적 컨텐츠 경쟁이 심해져서 오죽하면 공중파TV에서

황색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책을 세우자는 토론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1992년쯤 샤론스톤이 주연한 원초적 본능이 개봉되면서

적어도 외부적으론 성에 대해 보수적입장이 상당히 많이 걷혀버렸다는걸 알수 있다.

예전같으면 검열에서 다 삭제되어 알맹이 없는 영화가 되어버릴 이 영화

아니면 수입단계에서 이미 저지당했을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까지 한걸보면..


원초적 본능은 일주일만에 관객 10만명이 돌파하는등 당시로썬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때는 100만명만 돌파해도 대기록에 올라갈 때였으니 더이상 말이 필요하겠는가?


1993년들어서 태평양 아모레 화장품에서 이병헌과 김원준 신은경을 내세워

아모레 트윈엑스라는 화장품을 출시하고

이전 세대와는 다른 나를 표현하면서 X세대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에 맞춰 언론에서도 신세대인 X세대를 다루었고

내일은 사랑 출연으로 인기를 얻은 이병헌

SBS 인기가요에 유독 출연이 많았던 김원준

시기는 늦지만 MBC 드라마 종합병원에 출연한 신은경

도 조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간스포츠는 2000년대 중후반 한국일보사와 문제가 생겨

중앙일보사로 이적하는등 꽤 충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국민일보 계열의 스포츠 투데이(스투닷컴)가 창간하면서 스포츠신문은 또다시 격변에 휘말렸다.

동아일보의 스포츠동아 경향신문의 스포츠칸(후에 스포츠경향으로 바뀜)까지 가세하면서

쇠락해가는 스포츠 신문의 경쟁(인터넷과 PC방의 보급)은 더욱 가열되었지만

그 결과는 글쎄.. 모르겠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