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신문잡지2015. 11. 25. 08:27

1994년 한국비료 삼성정밀화학 지면광고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

제3공화국의 박정희가 연관된 사카린 밀수 사건

몸통이 노발대발하며 수사를 지시하는 코미디같은 상황

셀프격노. 이명박의 재판을 보는 듯 하다.



사카린의 원료 OTSA를 삼성이 밀수입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에서 보도되었고

이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김두한은

국회에서 오물을 투척하기도 하였다.

(한참 뒤에 동아일보 사주 김병관의 아들 김재열과

이건희의 딸 이서현이 결혼해 사돈을 맺는다.

1990년대 이건희 취임이후 삼성 계열사였던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간에 갈등이 있었다.)



이맹희의 회고록과 1994년 한겨레쪽 인터뷰 기사를 보면

박정희의 지원아래 사카린을 밀수한 이맹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병철은 검찰조사를 받았고

상무였던 차남 이창희가 검찰로부터 구속 기소를 받았다.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로 결정하였고

27년 뒤인 1994년 삼성은 한국비료를 인수해

삼성정밀화학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한국비료를 인수한지 21년뒤

삼성그룹의 화학사업 정리계획에 따라

한국비료는 롯데그룹의 롯데케미칼에 인수되게 되었으니

현대그룹의 현대양행(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을 보는듯 하다.


한국중공업 로고

롯데케미칼(호남석유화학) 로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10. 14. 21:55

1999년 삼성상용차 1톤 트럭 SV110 지면광고


삼성그룹의 이건희는 자동차 사업진출을 위해서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 쪽에

부지를 매입해 삼성자동차 공장을 짓는등 김영삼으로부터 사업승인을 받기위해 꽤나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당시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대우 쌍용 기아차 등 자동차 관계사 7개사는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에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광고를 내놓았지만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막을순 없었다.



1994년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을 반대하는 자동차 7개사의 반대성명광고


삼성은 승용차를 내놓기 전에 먼저 삼성중공업에서 1994년쯤 대형트럭 판매를 시작했다.
는 삼성자동차를 설립하기전인 1990년부터 지속적으로 상용차사업에 진출의지를 보였다.

1992년 상용차사업승인을 정부로부터 받았고 1994년 상용차사업에 먼저 뛰어들었다.

 


1995년 설립된 삼성자동차는 2년뒤인 1997년 첫 승용차인 SM5를 시판하기에 이른다.

허나 3.5.7시리즈를 BMW의 이의제기로 외국에서 사용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SM5 광고역시 벤츠의 광고 표절의혹이 일었다.

 

1995년 삼성그룹의 자동차사업자 모집 지면광고

1997년 삼성자동차 브랜드 네임공모 지면광고

 

삼성자동차와 상용차는 IMF 부채문제 기아차 인수실패등 여러가지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삼성자동차는 르노에 인수되었고
삼성상용차 역시 야무진 이란 브랜드로 소형트럭을 내놓았지만 뒤처리가 깔끔하진 못했다.

다.

 

르노삼성자동차 로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1997년 CI 변경후 새한그룹 출범 지면광고

1997년 출범한 새한그룹의 로고와 계열회사들


삼성그룹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가 세운 새한미디어가 그룹의 모기업으로

1991년 이창희가 사망하자 그 아들인 이재관이 그룹을 물려받고 제일합섭 지분을 넘겨받은후

삼성그룹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었다.


이영자 회장

이재관 사장


이로써 삼성그룹으로부터 계열불리된 그룹은

제일제당그룹 / 새한그룹 / 신세계그룹 / 한솔그룹 이렇게 총 4개다.


1996년엔  새한미디어 / 새한 콘크리트 / 새한이동통신 / 새한 종합개발 / 황성통운에 제일합섬까지 6개 계열사였으나

1997년 4월 그룹출범시엔 총 8개 계열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소속회사는

주식회사 새한 / 새한미디어 / 새한건설 / 새한마텍

새한텔레콤 / 디지탈미디어 / 새한로직스 / 새한정보시스템이다.


그룹출범당시 매출액 기준으로 재계순위 35위를 차지하였고

이영자회장과 그 아들 이재관 사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새한텔레콤은 삐삐로 잘 알려진 무선호출기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1997년 10월 새한그룹 지면광고

1997년 10월에도 새한그룹 계열사 숫자는 8개로 변화가 없다.

소속된 계열사들을 적어보자면


(주)새한 - 옛 제일합섬 / 새한미디어 / 새한건설 / 새한마텍

새한텔레콤 / 디지탈 미디어 / 새한로직스 / 새한정보시스템


이렇게 총 8개사다



새한미디어의 경우

IMF가 닥친 이후에도 구미필름공장에 1조가 넘는 무리한 시설투자를 했고

주식회사 새한의 대책없는 계열사 지급보증이 결국 새한그룹의 몰락을 이끌었다.



섬유사업의 부진과 철지난 비디오 필름사업에 과도한 투자

그리고 주식회사 새한의 1조 5천억 부채중에 계열사에

지급보증 대출해준 금액이 상당부분 차지하여

경영진의 무분별하고 잘못된 판단이

결국 새한그룹의 해체로 까지 이어졌다.






그 와중에 삼성의 금융계열사가

가장먼저 대출금 상환한 것을 보면

과거 기아자동차 사태를 보는것 같다.

설상가상이란 바로 이런경우에 적절한 말이다.

새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믿었던 도끼에 발등찍힌 격이다.



이재찬의 경우 2008년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여

당시 대재벌총수임에도 불구하고 조카에게 신경쓰지 않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주식회사 새한은 웅진그룹에 인수되어 웅진케미칼로 사명을 변경하었으나

웅진그룹도 승자의 저주에 빠졌음인가

극동건설 인수등 윤석금 웅진회장의 무리한 인수확장이 그룹의 위기를 불러왔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