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신문잡지2015. 7. 31. 22:50

1988년 동아제약 로얄디 칼라판 지면광고

1988년 동아제약 이덕화 김청 흑백판 지면광고


1987년 1월 10일부터 시작한 MBC 주말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같이 출연했던 이덕화와 김청은

다음해 드라마의 인기를 바탕으로 동아제약 로얄디 CF를 같이 찍는다.

이후 김청은 빠지고 이덕화는 이혜영과 같이 찍는데...


그렇다면 로얄디 CF에서 빠진 김청은 어디로 갔을까?

바로 아래 보이는 종근당의 속청 CF를

한지붕 세가족에서 만수 아빠로 인기를 끌던

최주봉과 같이 찍었다.


1990년 종근당 김청 최주봉 속청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7. 31. 09:18

1992년 서주우유 과일 요구르트 지면광고


1980년대만 해도 학교에서

매일아침 배달되는 우유가 있었다.

물론 이건 다달이 돈을 내야 마실수 있었고

그 배달되던 우유 상표는

서주우유였다.


광고에 적힌대로

하얀색 서주우유와

우유아이스크림인 서주 아이스주 서주밀이

저 회사의 주력상품이었다.


1988년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나

법원몰래 어음 몰래발행

빙과류 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했으나

판매가 부진하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고름우유 파동으로 회사는 더 어려워졌다.


1999년 1월 효자원에 132억원에 인수되었다.

그러나 설비노후화와 노조와의 문제로 유가공사업부문에서 인수 1년만에 철수하였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7. 29. 21:41

1994년 포카리스웨트 심은하편 지면광고

1994년 포카리스웨트 심은하편 지면광고


1992년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학교 농구부의 돌풍

좀 지난후지만 슬램덩크의 인기

그리고 MBC 마지막 승부 방송과 인기까지

1990년대 초중반은 농구열풍이라고 할정도로

농구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인기가 높았다.



마지막 승부에서 다슬이로 주연한 심은하가

손지창과 장동건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마지막엔 장동건과 이어지는 이야기의 여자주인공으로 나오면서

큰 인기를 얻어 포카리 스웨트 CF의 여자모델로 나온것도

농구의 인기와 관련이 있다.



이 드라마로 인기와 돈 CF를 거머쥔 심은하는

여자 탤런트라면 누구나 바라는 한국화장품 CF까지 접수한다.

좀 시간이 지난후지만 한석규와 맥심 커피 CF까지...

한석규와는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도 같이 찍었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7. 28. 19:04

1997년 10월 1일

SK텔레콤 011과 신세기 통신 017

2개사가 경쟁한던 이동통신 서비스에

한국통신프리텔 016 한솔PCS 018 LG텔레콤019가 가세해

5개사가 경쟁하는 접전이 벌어졌다


아래는 1997년 10월 1일 이후 PCS 3사가 게재한 지면 광고들이다

한국통신프리텔은 칼라판 전체광고를

한솔PCS는 양면의 흑백광고를

LG텔레콤은 신문 1페이지 칼라 하단광고를 실는 전략을 택했다.


한국통신 프리텔은 016 개통절

한솔PCS는 국민들의 귀가 시원해지는 원샷 018

LG텔레콤은 약속을 지키는 반가운 019 PCS

를 광고문구로 내세우며 홍보를 하였다.


이에 질세라 SK텔레콤과 신세기 통신도 방어광고를 게재하였는데

SK텔레콤은 추석대비 교통정보 서비스 제공을 내세워 SKT선택이 현명하다는걸 강조하였고

신세기통신은 세계 최단시간 100만가입자 돌파를 내세워 광고하였다.


SK텔레콤의 첨단교통정보 서비스를 내세운 011 광고

최단기간 100만고객 돌파를 강조한 신세기통신 017 전체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7. 27. 08:40

1992년 고려당 대리점 모집 지면광고

1990년 크라운제과 크라운스낵 크라운 엔지니어링 크라운 베이커리 신입사원 지면광고


빵집하면 고려당이 기억나던 시절

크라운제과에서 크라운베이커리라는 프렌차이즈 제과점을 설립하였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한개 있었는데 생각보다 꽤 오래 자리하고 있던걸로 안다.

뉴욕제과가 유명하던데 뉴욕제과는 나와는 인연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이용해본적도 없고...




고려당이나

크라운 베이커리보단 동네빵집을 더 자주 이용하였다

브랜드빵집은 가격도 비싸기 때문에

별다른 이용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쯤 채시라와 정우성을 모델로한 샤니와 파리크라상의 파리바게트가

CF와 함께 매장을 늘려나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1위 업체가 되어버렸다.





CJ그룹에서 김현주를 모델로 뚜레쥬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체인점 모집에 나서

2천년대 들어선 CJ푸드빌의 뚜레쥬르와 SPC그룹의 파리크라상 파리바게트

2파전으로 양상으로 변했다.




2013년 4월 4개사의 매출액 영업이익 매장수를 보면   (자료출처 - 창업경영신문)


 

 매출액

영업 이익

 매장수

 1. 파리바게트

1조5733억 6620만 3천원

 569억 5990만 5천원

3141 개

 2. 뚜레쥬르

 7900억 2033만원

-182억 369만 5천원

1303 개

 3. 크라운베이커리

 427억 9963만 5천원

- 31억 7885만 9천원

 200 개

 4. 신라명과

 385억 5478만 9천원

- 18억 9829만 5천원

 88 개


파리바게트를 제외하고 모두다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2 - 4위 매장수를 다합쳐도 절반을 조금넘는수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잡담방2015. 7. 26. 20:49

1989년 6월 해태음료 밀크탄산음료 크리미에 홍콩영화배우 왕조현을 모델로 세운 지면광고


한국에서 코카콜라 제품을 판매하는 4개사

두산식품 / 범양식품 / 우성식품 / 호남식품에서

밀크탄산음료 암바사를 1984년 첫 출시했다


탄산에 우유를 첨가한 기발한 제품이었는데

그동안 판매가 부진하다가 1987년들어

콜라 사이다가 판매부진을 겪고 보리음료와 암바사가 매출신장을 기록하자

해태음료 롯데칠성음료가 뛰어들어 경쟁에 가세하였다.


보리와 밀크탄산음료시장에 뛰어들었는데

보리음료는 나중에 다룰것이니 패스하고

밀크탄산음료는 해태는 크리미 왕조현을 모델로

롯데칠성은 밀키스 주윤발을 모델로 내세워

제품경쟁뿐만 아니라 모델경쟁도 치열했다.


왕조현이 크리미 모델을 할때 노래하는 장면은 왕조현의 목소리 그대로 썼지만

멘트를 하는 장면은 KBS출신 여자성우 권희덕이 더빙하였다.

당시 이 광고는 주목도 많이 받았지만 여성 시청자들이 꽤나 싫어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주윤발이 홍보에 나선 롯데칠성 밀키스는

오토바이를 타고 밀키스 밀키스를 외치다 마지막에 주윤발이

사랑해요 밀키스~ 라는 문구로 마무리하면서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십수년뒤에 최지우가 모델로 나서 리메이크한적이 있다.


밀키스 CF에서 주윤발의 사랑해요 밀키스라는 문구가 국민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어

롯데칠성은 7개월간 24개들이 180만 상자가 나가는등 판매 폭증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암바사는 오현경을 모델로 기용했는데

당시 사진과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패스

암바사의 판매가 늘어나자 시장을 키운 코카콜라 4사 입장에선

뒤늦게 뛰어든 해태와 롯데가 얄미울법도 하다.


시장을 개척하고 파이를 키우고 먹을만하게되자

뒤늦게 뛰어들어 미투제품 내놓고 과실을 나눠먹으려고 하니

오죽 얄미웠을까?


1990년 암바사의 점유율이 59.1%인걸보면

 롯데칠성음료(26.6%)와 해태음료(14.2%)가 뛰어든 후에도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한게 놀랍기만하다.


1989년 소피 마르소, 장국영등 외국인 모델 열풍이 분 이후

외국모델 기용제한에 걸려 국내모델로 교체되었다.

그런데 5-6년후 다시 분 외국인 모델열풍(새넌 도허티 샤론스톤)은

무엇으로 다시 설명할것인가?


롯데칠성음료 밀키스 잡지광고 주윤발의 사랑해요 밀키스~가 주목할만한 부분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재벌 대기업/잡담방2015. 7. 25. 09:01

1990년 10월 한라그룹 신입사원 모집 지면광고


한라그룹

창업주는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동생이자 둘째인 정인영이다.

정주영과 정인영


정인영은 일본 유학후 귀국 동아일보 기자로 지내다가

1953년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하였다

이후1962년 만도기계와 현대양행(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설립

1978년 한라시멘트 1981 한라건설을 세운뒤

1984년부터 한라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신군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의해

중공업과 자동차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정주영과 김우중에게 강요했던 모양이다.

정주영은 자동차를 택했고 김우중은 중공업을 택했으나

금융권에서 2천억원을 지원해달라고 신군부에 요청했다.

신군부는 2천억원을 지원해 주느니 차라리 공기업화 시킨다며

한국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시켰다.

이 내용은  정주영의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 묘사되어 있다.


정주영 입장에선 현대양행을 정부에 빼았기고 나서

그 동생 정인영이 중공업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는지 한라중공업을 다시 설립했다.

이때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아선지 정인영은 휠체어 신세를 지게되었다.


정주영과 김우중의 관계는 이때 이후 악화되었다. 김우중의 나이는 정몽구와 2-3년 차이나는터라

정주영입장에선 김우중이 상당히 건방지게 느껴졌을수도 있다.

정주영이 보기에 김우중은 부실기업 인수로 커온 기업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대우그룹자체가 정부로부터 금융권지원을 받고 부실기업인수로 그룹의 덩치를 키웠다.

그래서 전두환의 신군부에도 그 같은 요구를 했던것이다. 물론 현대양행의 부채문제도 있었다.)


1992년 정주영이 대선에 출마선언하자

김우중은 자기도 출마하려다가 박태준에게 신당창당을 제의하면서 1천억원을 동원하기로 하는데

포항제철을 하면서 대우의 회계와 부채문제를 알고 있던 박태준은 대우자동차를 팔아

그 돈을 마련할 생각이면 회사재무구조부터 고쳐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무튼 정인영의

한라그룹은 이후 재계순위 12위까지 오르는등 승승장구했으나

1997년 12월4일 5천억원의 어음가운데 1700억원을 막지 못하고 최종 부도처리됐다.

공교롭게도 한라중공업에 1조원을 투자했고 가격덤핑으로 인해 적자를 내다가

이렇게 한라그룹 해체라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한라중공업은 현대중공업에 위탁경영되다가

현대삼호중공업이라는 현대중공업 계열사로 편입됐다.


정인영의 둘째 아들인 정몽원이 회장이 되어

제 2의 한라그룹을 재건하고 있는데 2000년대 들어선

정확히 어떤 계열사들이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현대양행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관련지면광고를 올리도록 하겠다.


1992년 2월 한라그룹 계열사


한라중공업 / 만도기계 / 한라건설 / 한라시멘트 / 한라공조

한라자원 / 한라해운 / 한라레미콘 / 한라창업투자 / 학교법인 배달학원

1990년에 비하면 계열사가 2개 늘어났다

1992년 10월 한라그룹 계열사 마이스터라는 계열사가 하나 더 늘었다. 총 11개

이때 한라그룹 계열사는 총 14개

캄코 한라마이티정보통신 한라제지 이렇게 3개 계열사가 늘었다

1992년 10월 1일 한라그룹 흑백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스포츠2015. 7. 19. 18:30



한국일보사 계열의 일간스포츠가 1969년 9월 창간되었고 쭉 스포츠신문 시장을 독점해오다가

서울신문사 계열의 스포츠 서울이 1985년 6월쯤에 창간되면서 스포츠신문 경쟁시대가 열렸다.



보안사령관 시절의 전두환


서울신문은 YTN 연합뉴스와 같이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관영언론의 입장이 강했기 때문에

전두환 신군부 집권기에 실세중에 실세였던 3허(허삼수 허화평 허문도)

그 중에서도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던 허문도가 3S정책(SEX SPORTS SCREEN)을 펼치는걸

전두환에게 건의 대중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우민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프로야구의 개막과 활성화가 되었고 거기에 맞물려 스포츠서울도 창간되었다.

(허화평과 허삼수는 군인출신도 아니고 쿠데타에 참여하지도 않던 조선일보 출신의 허문도가

전두환에게 발탁되어 자신들과 함께 3H라고 묶여서 불리는것을 상당히 싫어했다.)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5공 정권의 실세였던 세사람



게다가 조선일보사에서 1990년 3월에 스포츠조선까지 창간하면서

오랫동안 3사 경쟁체제가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해도 신문면이 아무리 많아봐야 16면에서 24면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32면을 넘어서고 컬러TV방송시작과 컬러면이 많은 스포츠 신문이 창간되더니

통제와 검열이 강했던 성에 대해서 1990년대 들어서 빗장이 풀어졌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소설 연예인 복장 심지어 광고(700 전화광고)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꽤 많이 풀어졌다.

스포츠 신문 3사의 선정적 컨텐츠 경쟁이 심해져서 오죽하면 공중파TV에서

황색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책을 세우자는 토론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1992년쯤 샤론스톤이 주연한 원초적 본능이 개봉되면서

적어도 외부적으론 성에 대해 보수적입장이 상당히 많이 걷혀버렸다는걸 알수 있다.

예전같으면 검열에서 다 삭제되어 알맹이 없는 영화가 되어버릴 이 영화

아니면 수입단계에서 이미 저지당했을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까지 한걸보면..


원초적 본능은 일주일만에 관객 10만명이 돌파하는등 당시로썬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때는 100만명만 돌파해도 대기록에 올라갈 때였으니 더이상 말이 필요하겠는가?


1993년들어서 태평양 아모레 화장품에서 이병헌과 김원준 신은경을 내세워

아모레 트윈엑스라는 화장품을 출시하고

이전 세대와는 다른 나를 표현하면서 X세대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에 맞춰 언론에서도 신세대인 X세대를 다루었고

내일은 사랑 출연으로 인기를 얻은 이병헌

SBS 인기가요에 유독 출연이 많았던 김원준

시기는 늦지만 MBC 드라마 종합병원에 출연한 신은경

도 조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간스포츠는 2000년대 중후반 한국일보사와 문제가 생겨

중앙일보사로 이적하는등 꽤 충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국민일보 계열의 스포츠 투데이(스투닷컴)가 창간하면서 스포츠신문은 또다시 격변에 휘말렸다.

동아일보의 스포츠동아 경향신문의 스포츠칸(후에 스포츠경향으로 바뀜)까지 가세하면서

쇠락해가는 스포츠 신문의 경쟁(인터넷과 PC방의 보급)은 더욱 가열되었지만

그 결과는 글쎄.. 모르겠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7. 17. 20:09

1995년 현대자동차 마르샤 2.0 VL 지면광고


소나타3와 그랜저 사이에 있던 모델로

현대자동차는 마르샤에 많은 기대를 건듯하나

생각보다 많이 팔리지 않았던지

나중에 소나타 가격을 마르샤 가격으로 올리려고 그랬는지

얼마 못 버티고 단종된 현대자동차로썬 비운(?)의 모델이다.


1995년 마르샤 세 모델의 가격은

마르샤 2.5 GOLD 2440 만원 / 2.0 VLS 1690만원 / 2.0 VL 1520만원 이었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CF/신문잡지2015. 7. 15. 18:19

1995년 1월 1일 아시아나 항공 모델 박주미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단아하다.


노태우 정부시절 제2민항으로 출범한 아시아나항공

1988년 말부터 아시아나 항공 CF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당시 광고 모델이었던 박주미의 미모가 돋보였었다.


각종 여행사 앞에는 아시아나 항공 모델인

박주미의 입간판이 서있었고

내가 사는 동네에도 하나 서 있어서 길을 오갈때

유심히 봤던 기억이 남아있다.


아시아나 항공의 로고 역시 한복을 입은 여자가 두팔을 벌리고 맞이하는 모습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초기 광고와 상표가 맞아떨어지는 광고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나 항공 박주미 지면광고 1

아시아나 항공 박주미 지면광고 2


당시 대한항공에선 노태우 정부의 제 2민항 사업과 관련해

서운함을 표했던걸로 안다.

서슬퍼런 전두환 시절엔 프로스펙스로 유명한 국제그룹해체라는

큰 사건이 있었으니 정권이 바꼈다곤하나

그렇게 큰 항의를 하진 못했을것이다.


한진그룹과 대한항공의 태극마크 영문명이 돋보인다.


육로 한진택배 해로 한진해운 공중의 대한항공까지

육해공 운송의 한진그룹과

금호고속과 금호타이어 석유화학의 금호그룹이

하늘에서 한판 대결을 벌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2000년대 중후반 금호그룹은 대한통운까지 인수하여

해상을 제외한 분야에서 한진그룹과 경쟁하게 되었다.


1988 - 2000년대 중반까지 쓰던 아시아나 항공 로고

변경된 아시아나항공 로고

금호그룹에서 금호아시아나 그룹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그룹 CI도 교체되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대우건설 대한통운 등

빛을 내서 무리하게 인수한탓에

금호그룹은 경영권마저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다.

재벌문어발 확장의 또 하나의 사례가 되어버린 경우다


금호아시아나 그룹 산하시절 대한통운 로고

금호아시아나 그룹 산하에서 대우건설 로고


대한통운은 현재 CJ그룹에 인수되어 CJGLS와 합병 CJ대한통운으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대우건설은 산업은행 산하의 기업이 된 상태다.


CJ그룹 로고

CJ대한통운 로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