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한라그룹 신입사원 모집 지면광고
한라그룹
창업주는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동생이자 둘째인 정인영이다.
정주영과 정인영
정인영은 일본 유학후 귀국 동아일보 기자로 지내다가
1953년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하였다
이후1962년 만도기계와 현대양행(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설립
1978년 한라시멘트 1981 한라건설을 세운뒤
1984년부터 한라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신군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의해
중공업과 자동차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정주영과 김우중에게 강요했던 모양이다.
정주영은 자동차를 택했고 김우중은 중공업을 택했으나
금융권에서 2천억원을 지원해달라고 신군부에 요청했다.
신군부는 2천억원을 지원해 주느니 차라리 공기업화 시킨다며
한국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시켰다.
이 내용은 정주영의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 묘사되어 있다.
정주영 입장에선 현대양행을 정부에 빼았기고 나서
그 동생 정인영이 중공업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는지 한라중공업을 다시 설립했다.
이때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아선지 정인영은 휠체어 신세를 지게되었다.
정주영과 김우중의 관계는 이때 이후 악화되었다. 김우중의 나이는 정몽구와 2-3년 차이나는터라
정주영입장에선 김우중이 상당히 건방지게 느껴졌을수도 있다.
정주영이 보기에 김우중은 부실기업 인수로 커온 기업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대우그룹자체가 정부로부터 금융권지원을 받고 부실기업인수로 그룹의 덩치를 키웠다.
그래서 전두환의 신군부에도 그 같은 요구를 했던것이다. 물론 현대양행의 부채문제도 있었다.)
1992년 정주영이 대선에 출마선언하자
김우중은 자기도 출마하려다가 박태준에게 신당창당을 제의하면서 1천억원을 동원하기로 하는데
포항제철을 하면서 대우의 회계와 부채문제를 알고 있던 박태준은 대우자동차를 팔아
그 돈을 마련할 생각이면 회사재무구조부터 고쳐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무튼 정인영의
한라그룹은 이후 재계순위 12위까지 오르는등 승승장구했으나
1997년 12월4일 5천억원의 어음가운데 1700억원을 막지 못하고 최종 부도처리됐다.
공교롭게도 한라중공업에 1조원을 투자했고 가격덤핑으로 인해 적자를 내다가
이렇게 한라그룹 해체라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한라중공업은 현대중공업에 위탁경영되다가
현대삼호중공업이라는 현대중공업 계열사로 편입됐다.
정인영의 둘째 아들인 정몽원이 회장이 되어
제 2의 한라그룹을 재건하고 있는데 2000년대 들어선
정확히 어떤 계열사들이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현대양행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관련지면광고를 올리도록 하겠다.
1992년 2월 한라그룹 계열사
한라중공업 / 만도기계 / 한라건설 / 한라시멘트 / 한라공조
한라자원 / 한라해운 / 한라레미콘 / 한라창업투자 / 학교법인 배달학원
1990년에 비하면 계열사가 2개 늘어났다
1992년 10월 한라그룹 계열사 마이스터라는 계열사가 하나 더 늘었다. 총 11개
이때 한라그룹 계열사는 총 14개
캄코 한라마이티정보통신 한라제지 이렇게 3개 계열사가 늘었다
1992년 10월 1일 한라그룹 흑백지면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