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신문잡지2016. 1. 18. 00:18

1992년 12월 10 통일국민당 기호 3번 정주영 후보 지면광고

1992년 12월 17일 통일국민당 "정주영을 선택하는 날입니다" 지면광고

현대그룹 " 움직이기 불편하다고 권리까지 포기할 순 없죠" 지면광고

현대그룹의 전면광고로 투표 독려광고지만 정주영을 위해 한표를 행사해달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해야겠다.

14대 대통령 선거 시도별 개표현황. 서울에선 김대중이 8만표정도 앞섰고 경기쪽은 김영삼이 15만표 정도앞섰다.

정주영은 16.1%의 표를 얻었다. 박찬종은 6.3%


이례적으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쪽에서

동아일보에 광고를 게재하였는데

직접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속내용은

당시 집권정당이었던 민자당의 통치가 오래되었으니

이제 새로운 정당과 후보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내가 찍는다면 정주영이나 박찬종에 투표를 했을테지만

아쉽게도 두 후보뿐만 아니라 양김씨 외에 모든 후보를 특표율을 다합쳐도

3위의 자리밖에 차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정주영과 현대의 특성상

울산이 포함되었던 경남권에서 높은 득표율을 얻을것으로 예상했었지만

23만 9천표대로 김대중보단 2% 높았지만 김영삼의 1/7정도 수준이었다.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으로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세무조사및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곤욕을 치뤘다.


김영삼은 칼국수를 통한 청렴이미지

전노 비자금조사, 금융실명제 실시등

집권 초중반까지 개혁과 청렴의 이미지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후반부 아들인 김현철 문제와 IMF가 터지면서

결정적으로 민심이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자민련 총재였던 김종필은 의원내각제를 통한 수상자리를 노렸으나

끝내 의원내각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의 정주영은 금강산 관광 기아자동차 LG반도체 인수등

김대중 정권들어 특혜시비가 불거졌다.

거기에 아들인 정몽구와 정몽헌등이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서로 정회장의 후계자라고 싸우는등

왕자의 난이 불거져 말년엔 그리 편한 여생을 누리진 못했다.


1992년 12월 16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재벌 대기업/잡담방2015. 8. 28. 20:39

1997년 HBS 현대방송 지면광고

1996년 HBS 현대방송 지면광고

현대방송 로고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현대방송은 현대그룹에서 만든 케이블 TV 방송사다.


1979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호텔신라 회동


라이벌 삼성그룹은 1965년 일간지 중앙일보사와

방송사 TBC 동양방송을 소유중이었고

1970년대말 전후로 삼성계열 언론사의 현대에 대한 불리한 보도로 인해

현대그룹과 삼성그룹간에 혈전이 벌어지기도 했었기 때문에

현대그룹의 총수 정주영은 언론과 방송사에 대한 소유욕구가 있었다.


오랜 숙원이었던 언론사

문화일보사를 1991년 11월 창간하게 되는데

이듬해인 1992년 1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그해 대선에 뛰어들게 된다.

이건 과거 군사정부때 권력자에게

끌려다니며 바쳐야했던 뇌물

그리고 현대양행을 갈취당한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1995년엔 케이블 TV 현대방송까지 개국하면서

방송과 언론사 소유에 대한 꿈이 일부나마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2년 대선에 나간 정주영 당선 실패는

정주영과 현대의 고난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 소위 괴씸죄에 걸려

현대그룹은 세무조사와 함께

여러부분에서 불이익을 당했는데

HBS방송이 개국한 1995년은 김영삼정부 중반쯤이었다는거다.





언론과 권력에 대한 불이익을

당해봤기에 대선에 출마했지만

오히려 현대그룹 전체로 피해를 보게되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재벌총수들에 대한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수사까지 시작되었다.

그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뒤 정주영은 일선에서 물러나

정몽구와 정몽헌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으로 직함을 바꾸었다.



정주영의 대선에 대한 출마욕심과 언론 방송에 대한 소유욕구는

문화일보사 계열분리 / 현대그룹 세무조사와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조사

현대방송 매각을 남겼을 뿐이었다.


삼성그룹 역시 전두환 정권하에서 TBC 동양방송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갈취당하였는데

1990년대 소송을 걸었으나 패배하여

KBS2 채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수 없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글은 따로 나중에 올려보겠다.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
재벌 대기업/잡담방2015. 7. 25. 09:01

1990년 10월 한라그룹 신입사원 모집 지면광고


한라그룹

창업주는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동생이자 둘째인 정인영이다.

정주영과 정인영


정인영은 일본 유학후 귀국 동아일보 기자로 지내다가

1953년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하였다

이후1962년 만도기계와 현대양행(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설립

1978년 한라시멘트 1981 한라건설을 세운뒤

1984년부터 한라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신군부의 산업합리화 조치에 의해

중공업과 자동차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정주영과 김우중에게 강요했던 모양이다.

정주영은 자동차를 택했고 김우중은 중공업을 택했으나

금융권에서 2천억원을 지원해달라고 신군부에 요청했다.

신군부는 2천억원을 지원해 주느니 차라리 공기업화 시킨다며

한국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시켰다.

이 내용은  정주영의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 묘사되어 있다.


정주영 입장에선 현대양행을 정부에 빼았기고 나서

그 동생 정인영이 중공업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는지 한라중공업을 다시 설립했다.

이때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아선지 정인영은 휠체어 신세를 지게되었다.


정주영과 김우중의 관계는 이때 이후 악화되었다. 김우중의 나이는 정몽구와 2-3년 차이나는터라

정주영입장에선 김우중이 상당히 건방지게 느껴졌을수도 있다.

정주영이 보기에 김우중은 부실기업 인수로 커온 기업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대우그룹자체가 정부로부터 금융권지원을 받고 부실기업인수로 그룹의 덩치를 키웠다.

그래서 전두환의 신군부에도 그 같은 요구를 했던것이다. 물론 현대양행의 부채문제도 있었다.)


1992년 정주영이 대선에 출마선언하자

김우중은 자기도 출마하려다가 박태준에게 신당창당을 제의하면서 1천억원을 동원하기로 하는데

포항제철을 하면서 대우의 회계와 부채문제를 알고 있던 박태준은 대우자동차를 팔아

그 돈을 마련할 생각이면 회사재무구조부터 고쳐라며 핀잔을 주었다


아무튼 정인영의

한라그룹은 이후 재계순위 12위까지 오르는등 승승장구했으나

1997년 12월4일 5천억원의 어음가운데 1700억원을 막지 못하고 최종 부도처리됐다.

공교롭게도 한라중공업에 1조원을 투자했고 가격덤핑으로 인해 적자를 내다가

이렇게 한라그룹 해체라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한라중공업은 현대중공업에 위탁경영되다가

현대삼호중공업이라는 현대중공업 계열사로 편입됐다.


정인영의 둘째 아들인 정몽원이 회장이 되어

제 2의 한라그룹을 재건하고 있는데 2000년대 들어선

정확히 어떤 계열사들이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현대양행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관련지면광고를 올리도록 하겠다.


1992년 2월 한라그룹 계열사


한라중공업 / 만도기계 / 한라건설 / 한라시멘트 / 한라공조

한라자원 / 한라해운 / 한라레미콘 / 한라창업투자 / 학교법인 배달학원

1990년에 비하면 계열사가 2개 늘어났다

1992년 10월 한라그룹 계열사 마이스터라는 계열사가 하나 더 늘었다. 총 11개

이때 한라그룹 계열사는 총 14개

캄코 한라마이티정보통신 한라제지 이렇게 3개 계열사가 늘었다

1992년 10월 1일 한라그룹 흑백지면광고

Posted by 카시와자키 세나